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모든 이야기는 한 남자의 궁금증에서 시작된다. 보름 전 수술을 받던 어린 소녀가 죽자 형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더니 급기야는 의사인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의 소설을 몰래 훔쳐본다. ‘문제는 형이 이야기를 멈추고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형이 해 주었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이렇다할 이유 없이 타인에게 궁금증을 너머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나’는 주로 초기 단편인「매잡이」(나 - 민태준/곽서방)나 「소문의 벽」(나 - 박준) 등에서도 나타난다. 「매잡이」의 ‘나’는 ‘민형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민형 자신의 행적이 그 여행의 관심사가 되고 만 셈’인 취재 여행을 떠나게 되고, 「소문의 벽」의 ‘나’는 ‘박준의 일이 확실해지기 전에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가 싫’다고 생각한다. 앞서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이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어떤 ‘예감’이 있었다. 궁금증을 일으키는 상대의 행적이 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직감이었다. 무관은커녕 오히려 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처럼, 혹은 등 뒤로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처럼.
형의 내력에 대한 관심도 문제였지만, 형의 소설이 나를 더욱더 초조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이상하게 나의 그림과 관계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병신과 머저리」, p.19.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어떤 혼란한 꿈 속에 빠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 혼란스런 꿈속에서 나는 어쩌면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훨씬 긴 시간을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잡이」, p.90.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밝혀지기 전에는 잡지 일이라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게만 여겨지고 있었다. 예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예감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소문의 벽」, p.204.
‘나’는 이제 역학조사에 들어간다.「병신과 머저리」의 경우, ‘나’는 형의 소설을 매개로 현재 소녀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형과 동료를 죽이고 천릿길의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던 과거의 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나’는 형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기는 의문을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확대시킨다. 여기서 형에 관한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겹쳐지는데 흔히 형의 이야기는 <액자>로, 나의 이야기는 <액자 밖>으로 파악하여 이 작품을 액자소설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다른 단편에서도 볼 수 있는 바, 이청준의 소설에서 액자 밖의 서술자인 ‘나’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스며들어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므로 중층구조 내지는 겹층구조라 일컫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물론 액자소설의 형식을 세분화하여 이청준 소설에 나타나는 서술구조적 특징을 액자소설에 포섭할 수도 있겠지만 액자소설은 기본적으로 액자 밖 서술자 보다 액자의 이야기에 무게가 실리는 구조이므로 이청준의 소설에서처럼 액자 밖 서술자인 ‘나’가 단순한 전달자 역할을 거부하는 이상, 액자소설이라 정의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더 이상 형의 소설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혜인의 말마따나 형은 6·25 전상자로써 구체적인 환부가 있는 방황을 하고 있지만 자신은 형과 달리 구체적인 환부가 없다. 한국 전쟁에 동원된 형의 나이를 고려해 봤을 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60년대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벌써 전쟁의 상처와는 무관한 듯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현대사의 급변기였음을 감안해 연구자들이 ‘나’의 환부를 4·19의 경험이라 추정하긴 하지만 소설 속에 그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나’의 진술에 따라 ‘나’가 원인 모를 불행과 아픔과 상처로 괴로워하는 매우 자기 방어적인 사람이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형이 소설의 결말을 쓰지 않는 동안 자신의 화폭도 채울 수 없었기에 매우 초조하게 형의 소설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나’는 형의 소설을 분석해 보기도 하고(‘형은 이야기를 위해서 사건을 상당히 생략하고 초점을 향해 치밀하게 이야기를 집중시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25.) 자신이 처음 본 형의 소설이지 형의 첫 소설이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무턱대고 형의 소설적 상상력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형의 소설적 상상력은 절대로 그런 것을 상정해 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p.24.) 또한 형이 소설을 쓴다는 ‘일대 사건’을 이해해 보려고도 하며(‘형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함으로써 관념 속에서 살인을 되풀이하려는 것이었다.’, p.31.) 결말을 앞두고 망설이는 형에 대해 분노하기도 한다.(‘그렇다면 형은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웠다. 언제나 망설이기만 하고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였다. 자기의 실수만도 아닌 소녀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고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양심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확인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p.33.) 그러나 독자는 ‘나’의 성격에 비추어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한 말을 떠올려 보자.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이는 비단 ‘나’ 뿐만 아니라 형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정신 작용을 ‘투사’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형이 패잔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청준이 「지배와 해방」에서 밝힌 대로,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 올 수밖에 없도록 복수를 꿈꾸고 감행하여 복수심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어”(p.522.)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소설을 통해 극복하고자하는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나’의 환부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구체적인 환부가 없다는 명분으로, 엉뚱하게도 ‘나’는 형의 환부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인 얼굴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의 태도치고는 비겁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이유 없는 불행의 원인을 모색하고 그 아픔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다분히 정면 승부를 회피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화폭이 얼굴의 외곽선만을 떠놓고 채워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종작에 형의 원고를 제멋대로 탈고해 ‘기껏해야 불쌍한 김일병이나 죽인’ ‘나’에게 형이 “임마, 넌 머저리 병신이다. 알았어?”라고 호령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형은 자기를 솔직하게 시인할 용기를 가지고, 마지막에는 관모의 출현이 착각이든 아니든, 사실로서 오는 거에 보다 순종하여, 관념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형은 그 아픈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형을 지금까지 지켜 온 그 아픈 관념의 성은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만한 용기는 계속해서 형에게 메스를 휘두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창조력일 수도 있었다.
― p.45
그렇다면 형의 극복 의지는 성공했을까? 복수를 꿈꾸며 지배를 하고자 했던 형은 소설 속에서 자신이 죽인 오관모가 실제로 살아 있음을 알게 되고 여지껏 써 온 소설 원고를 태운다. 이로써 현실에 정직하게 대응하고자 하는 시도라든가, 현실 세계에 만연해 있는 억압에 대한 소설적 탐색이라는 적극적 대응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매우 흥미로운 단편「벌레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 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세계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이상 세계의 괴리감과도 맞닿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형의 시도나 간접적으로 시혜를 받아보고자 하는 동생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관념적인 갈등 극복의 허구를 소설의 관념성 자체가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념의 파괴가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반문 또한 해결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현이 이청준의 도덕적 정결주의를 지적하며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한 발언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작가의 물음이 보다 보편적인 의미로 확산되기 위해서 타인 또는 사회와의 긴장을 외면한 자기 중심적 고뇌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는 오생근의 주문이 나오게 된 지점도 여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병신과 머저리」는 궁극적으로 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불가피하게 서술구조상에 문제가 생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들이 액자구조라는 서사 전략을 짜는 이유는 내부 이야기를 객관화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전개하기 위함이다. 즉,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더 고민하는 형식인 셈이다. 이때 액자 서술자는 액자 구조의 담화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그의 관점이나 권위는 작품의 신뢰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액자소설은 또한 작가만의 독단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계와 사물(사건)을 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더구나 「병신과 머저리」에서처럼 액자 밖 서술자가 내부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그의 신뢰성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권택영의 지적대로 중층구조에서는 화자가 객관화되어 보편적인 인간의 결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신과 머저리」에서는 액자 밖 서술자의 신뢰도를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우선 시점의 이동을 꼽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나’가 편집 혹은 자신의 서술임을 명확히 밝히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형의 소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식의 시점 혼용이 나타나는 부분이 그러하고, 형수와의 대화 장면 중에 혜인과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 역시 그러하다. 이로 인해 마지막에 불태워졌다는 원고를 처음부터 자세히 인용하는 ‘나’의 서술 또한 의심스러워진다. 혜인의 등장 역시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데 이것은 ‘나’의 환부에 대한 인식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서술자인 ‘나’의 비중이 큰 이 소설에서 한 인물의 복합적인 시선이 오히려 구성을 산만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점에서 액자구조는 작가적 특징이 아니라 텍스트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 역시 쉽게 수긍할 수 없게 된다. 이청준은 그 자신의 말을 빌어 ‘작가는 신’이라는 신념에 따라 액자구조/중층구조가 작가가 등장인물을 온전히 지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 작가의 의도야 어찌 됐든 이 소설의 서사 전략을 굳이 액자 구조라고 칭해야 할지에 의문이 생긴다. 소설은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혹은 관점의 변화, 여러 인물의 등장과 사건의 발생으로 필연적으로 여러 개의 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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